Ghost in the Machine

전다화
 
 21세기에도 저주를 받는 것은 가능할까? 인터넷 세계에서 얼굴도 모르는 타인에게 그의 삶이 재앙과 불행으로 가득하길 바란다는 글을 쓰는 건, 타임라인에 끝없이 업데이트 되는 이미지에 더블 탭으로 좋아요를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물론 현실에서도 만원 지하철에서 입을 가리지 않고 기침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처럼 마음 속으로 끔찍한 저주를 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온라인에서만큼 가볍고 빈번하게 발화되지 않는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별다른 이유나 동기 없이 서로의 죽음을 빌고 종종 그들의 삶에, 그의 가족과 후손의 삶까지 구체적인 불행들로 가득하길 비는 글을 적는다. 하지만 인터넷 세계에 넘실대는 저주의 텍스트들은-때로 모욕이나 신변의 위협으로 간주되어 처벌받는 경우를 제외하면-쉽게 무시되며,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저주의 대상이 된 사람이 그 저주가 실현될 것이라 여겨 두려워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세워진 현대문명사회에서 저주받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듯하다.
 그런데 2015년 경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텀블러 트위터에서 저주를 바탕으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계정이 있다. 이 계정의 이름은 저주받은 이미지들(Cursed images)이다. 이 계정은 Cursed image라는 단어와-그 뒤에 마치 데이터베이스에 정리된 사진 아카이브에서 무작위로 가져온 듯한 인상을 주는 가상의 일련번호를 적어-이미지와 함께 업로드 했다. 2017111일을 마지막으로 계정은 운영되고 있지 않지만 이 계정과 같은 형식으로 이미지에 번호를 부여하고 저주받은 이미지로 명명하는 놀이는 일종의 밈으로서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된다. 저주받은 이미지는 주로 저화질의, 구도나 초점조명 등의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 쓰지 않고 찍은 디지털 사진들이다. 사진에 찍힌 대상은 대개 용도에서 벗어난 물건이나 조합으로 사용되는 물건, 도대체 뭐하는 곳인가 싶은 기괴한 장소,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 이상한 복장이나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처음 이 저주받은 이미지를 보았을 때 나 또한 강렬한 끌림을 느꼈다. 홀린 듯 이 계정으로 들어가 몇 장의 사진을 리트윗하고 비슷한 느낌의 사진을 찍어 보기도 했다.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배포 혹은 패러디 되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저주받은 이미지를 보면서 나는 이 밈의 식을 줄 모르는 인기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뉴욕 매거진에 20161031일 게재된 브라이언 펠만(Brian Feldman)의 칼럼, <무엇이 저주받은 이미지를 만드는가? (What Makes a Cursed Image?)>에서 필자의 가장 큰 의문은 이것이다. 저주받은 이미지에 열광하는 이들은 왜 이 이미지를 저주받았다고 부르는가? 텀블러와 트위터에서 약 2013년 정도부터 2017년 사이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저주받은 이미지는 대부분 플리커(Flickr), 포토버켓(Photobucket),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웹샷(Webshots)와 같은 사진 공유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왔던 사진으로, 일명 똑딱이(Point-and-Shoot)’라고 불리는 컴팩트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스냅 사진이다. 이는 공공연하게 누구나 볼 수 있는 사이트에 개인적인 스냅 사진을 수백 장씩 업로드 하는 데 아직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웹 2.0 초창기 시절의 유물이다. 당시 사이트를 이용하던 사람들은 사진을 남에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 올렸다. 브라이언은 자신의 글에서 이 사진들이 재미있고 호기심을 자아내며, 이상하지만, 저주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저주받은이미지는 단지 오래된 사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하면서, 밀레니얼 세대가 이 이미지를 이상하게 여기는 이유는 그들이 더이상 컴팩트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지난 시대 기술의 산물이 가진 결점을 이상하게 여길 뿐이라고 말한다. 그가 인터뷰한 인터넷의 역사(Internet History)’라는 아마추어 기록 블로그를 운영하는 더그 바텐하우젠(Doug Battenhausen)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인터넷에서 하는 모든 활동을 그들이 아는 모든 사람과 낯선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바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매우 신경 써서 관리한다는 말을 하는데, 브라이언은 이런 인식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사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만약 이 이미지들에서 뭔가 불편한 점을 느낀다면 그건 그것들이 저주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진들이 사진이 공들인 연출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는 기능을 하던 문화의 마지막 순간에 찍혔기 때문일 것이라는 결론 내린다.
 나는 저주받은 이미지에 대한 브라이언의 분석에는 동의하지만, 그가 저주받은 이미지가 저주받았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 바로 그 점이 저주받았다는 표현을 끌어들인 원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밈에 동참한 사람 중 진심으로 저주를 믿는 사람이 없더라도 일종의 신드롬이 될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이끌어낸 이유는 그 사진을 저주받았다고 표현한 것에 공감할 만한 어떤 으스스함, 혹은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마크 피셔(Mark Fisher)는 그의 저서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The Weird and the Eerie)에서 으스스한 것은 부재의 오류 혹은 존재의 오류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으스스한 감각은 아무것도 없어야 하는 장소에 무언가 존재할 때, 혹은 무언가 있어야만 할 때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소셜 네트워크로 언제나 접속된 상태에 익숙한 사람들은 저주받은 이미지에 담긴 2000년대 초반의 사진들, 아직 인류가 온라인으로 무한하게 연결되기 직전에 기록된 이미지를 볼 때 근 과거에 자신도 속해있던 그 세계가 지금은 완전히 단절된 다른 세계라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깨닫는다. 그리고 그 이미지 안에는 지금의 디지털 네이티브가 가진, 언제나 고화질 디지털 카메라와 컴퓨터를 장착하고 자신의 일상, 생각, 감정 등 모든 것이 타인에게 노출될 것을 인지하고 살아가게 되면서 새롭게 업데이트 된 자아가 없다. 또한 사진을 찍히는/찍는 순간 동시에 클라우드에 업로드 되거나 소셜 네트워크에 공유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이미지가 노출되며 어쩌면 시간이 흘러도 영구히 인터넷을 떠돌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없다. 그렇게 우리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지금의 세계보다 열등한, 한때 우리 자신도 속해 있었지만 돌아갈 수 없는 닫혀버린 세계의 마지막 기록을 보면서 이 사진 속 인물들에게는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걸 느낀다. ‘무언가 있어야만 하는 것의 부재를 목격할 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불안과 으스스함은 재빨리 저주받았다는 농담으로 분출된다.
 그런데 이런 결론에 도달하면 내게는 슬그머니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정말 구세계에 무언가 결여되어 있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없어야만 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가? 만약 확장된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라는 존재가 새로운 자아로 업데이트 했던 게 아니라, ‘는 변함없는 상태로 존재하는데 이런 를 지켜보며 스스로를 편집하고 연출하고 공유하도록 하는 무언가가 슬며시 들어온 것이라면 어떨까? 이 경우 저주받은 것은 무엇인지 모를-무엇이 될지 모를-낯선 존재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아닐지. 나는 생각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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